2024년 3월 31일. 나는 14년째 독일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있어. 브로히엔에 스프레드치즈를 바르고 간케제를 얹어 먹고 왔다. 테크아트로 튜닝한 파나메라를 타고 나왔어. 이윽고 알리안츠 아레나에 들어갔다. 이곳은 FC 바이에른 뮌헨의 홈구장이다. 재작년까지 이곳에서 3년간 전력분석관을 맡았다. 홈구장의 일등 초대석에 초대받았다. 오늘은 데어클라시커가 있는 날이었다. 이는 최고의 라이벌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경기를 의미한다. 하지만 나는 두 팀을 응원한다. 도르트문트와도 인연이 깊기 때문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곳의 2군에서 지도자로 일했어. 내 꿈을 가장 빛나게 해준 구단이다. 그래서 결론은 둘 다 열렬히 응원하고 있다. ‘구텐 모르겐’ 토마스 뮐러가 첫 번째로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유쾌한 성격으로 선수가 아닌 나와도 꽤 친분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만나서 밥을 먹고 놀기도 하는 사이다. 구단의 수뇌부와 관계자를 찾아 나섰다. 구내식당에서 이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다시 돌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지금은 열심히 운영 중인 아카데미 사업에 더 열중하고 싶었다. 이처럼 나는 현재 축구 종주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내 인생에는 정말 많은 난관이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아주 좋아했어. 그래서 꿈이 축구선수였어. 아무리 늦어도 11세 때부터는 레슨을 꼬박꼬박 받아야 했다. 하지만 집이 너무 가난했다. 그래서 초등학생 때 전혀 배우지 않았어. 일부러 축구부가 있던 안룡중에 진학했다. 그때 처음으로 축구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매일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때가 바로 2002년 월드컵 때였다. 우리 학교 선배였던 박지성 선수가 뛰는 모습을 봤다. 게다가 나와 같은 오른쪽 날개 포지션이었다. 나중에는 꼭 이런 선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경기에 거의 출전하지 못했다. 코치에게 부모님이 촌지를 낸 친구들만 계속 나갔다. 그래도 훈련만큼은 매일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고등학교를 수원공고에 진학했다. 저학년 때는 선배들에게 밀려 경기를 거의 뛰지 못했다. 어느덧 3학년이 돼 주전으로 뛰던 당시였다. 대통령 금배 전국대회를 8강까지 올랐다. 1골 7도움으로 좋은 기록을 보였다. 하지만 그날 태클을 깊이 맞아 슬개건이 끊어졌다. 그렇게 수술을 하고 7개월간 재활치료를 받아야 했다. 결국 축구로 대학도 프로팀도 갈 수 없었다. 입상 성적도 없었고 회복 후에도 내 무릎이 온전치 못했다. 더 이상 선수의 꿈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공부를 해본 적도 없어서 일반 대학에 갈 수는 없었다. 6년 동안 모든 것을 바쳤지만 그 끝이 너무나 참담했다. 그래도 축구를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선수와 가장 가까운 지도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자격증을 찾아봤어. 국내에는 AFC 지도자 자격증이 있었다. 현재는 등급이 P, A, B, C, D로 나뉜다. 하지만 당시에는 P급이 없었다. A급을 따지 않으면 프로팀을 맡을 수 없었다. 하지만 프로 경력 7년, 고교를 포함해 5년 이상의 경력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D급부터 올랐어야 했다. D급을 취득했다. 동호인 클럽 지도자만 할 수 있는 자격이었다. 그 후, 초등학생 지도자 정도의 C급을 조사해 보았다. 이때부터 실기가 중점적으로 시험이 치러졌다. 유소년들에게 자세를 보여줄 능력이 있는지를 판단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내 무릎은 계속 문제였다. 이해가 안 됐어. 왜 자격의 급에 따라 지도하는 수준과 나이가 나뉘었는가? 우선은 시간이 아까워 공익으로 입대했다. 무릎을 회복하면서 자격증을 더 알아봤어. 그러다 독일 유럽축구연맹 지도자격증을 알게 됐다. 선수 출신에 대한 제한도 없고, 한국과 비교해 B급 정도까지는 단번에 잡았다. 또 실기 비중이 510%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취득 후의 지도 수준에 대한 제한도 크지 않았다. 1년 동안 독일어를 최대한 공부했다. 공익임을 숨기고 야간에 일을 해서 돈을 모았다. 그리고 제대 후 바로 독일로 갔다. 노숙자처럼 생활하면서 지도자 교육을 받았다. UEFA C급 자격증을 시험했다. 함께 본 사람 중에는 이미 셀틱 유소년 코치도 있었다. 시험관이 4-4-2 포메이션으로 공격수가 전방을 압박하는 전술훈련을 해보라고 했다. 한국과는 시험의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래도 좋은 본보기를 보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 다음날 클럽팀에 대포로 메일을 보냈다. 14부까지 가리지 않고 지도자를 지원했다. 일단 어디서든 경력을 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부분 거절의 답변을 보내왔다. 이곳도 한국 못지않게 인맥사회였다. 그때 VfL 볼프스부르크 구단에서 연락이 왔다. 10세팀 지도자를 뽑는데 면접을 보자고 했다. 곧장 폭스바겐 아레나로 갔다. 면접을 통과했고, 그렇게 첫 번째 지도자 활동이 시작됐다. 15세 이하 팀은 파트타임제였다. 일은 많고 할 일은 적지만 성적에 대한 부담은 높았다. 일주일에 2~ 세 번의 트레이닝과 한 번의 경기가 있었다. 훈련 준비 1시간, 훈련 시간 1시간 반, 뒷정리 30분. 나는 언어 문제로 6시간 더 훈련을 미리 준비해야 했어. 그에 대한 보수는 월급으로 150유로밖에 되지 않았다. 그 당시 20만원도 안 되는 돈이었다. 그러던 중 또다시 난관이 찾아왔다. 프로클럽팀 지도자 외에는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유학 비자라도 받기 위해 퍼더본 대학에 입학했다. 유럽에서 학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어디까지 배웠느냐가 중요했다. 지도자에게는 스포츠 심리학이 좋다고 해서 내 전공으로 선택했다. 10세의 팀에서 별다른 성과 없이 한 시즌을 보냈다. 그 다음 해에 15세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원래 있던 감독이 그만뒀다고 한다. 당시 볼프스부르크의 15세 팀은 1부에 있었다. 부담스러웠지만 최선을 다했다. 월급도 400유로로 올랐다. 하지만 그해 곧바로 강등됐다. 그런데 그 다음 시즌에 17세 팀 코치를 권유받았다. 내가 보여준 노력과 발전 가능성이 잘 보였다고 말했다. 월급은 그대로였지만 나는 바로 승낙했어. 이때까지는 늘 외상값을 해야 했다. 그렇게 대학도 졸업했다. 또한 5년에 걸쳐 UEFA급 자격증까지 취득한 2024년 3월 31일. 나는 14년째 독일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있어. 브로히엔에 스프레드치즈를 바르고 간케제를 얹어 먹고 왔다. 테크아트로 튜닝한 파나메라를 타고 나왔어. 이윽고 알리안츠 아레나에 들어갔다. 이곳은 FC 바이에른 뮌헨의 홈구장이다. 재작년까지 이곳에서 3년간 전력분석관을 맡았다. 홈구장의 일등 초대석에 초대받았다. 오늘은 데어클라시커가 있는 날이었다